2004년 10월 21일
자유 의지와 결정론...2nd
관련 글 : 자유 의지와 결정론...1st
1. 머리말
우리에겐 과연 의지의 자유가 있을까? 있다면 혹은 없다면,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 앞에 보이는 현실들을 관찰함으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은,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어떻게 연결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두 가지 견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견해로서 우리가 현실로 느낄 수 없는 것, 신학적 결정론과 운명적 결정론은 언급하지 않고자 한다.
2. 통분
자유 의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인간이란 그가 몸담고 있는 자연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가를 생각해보자. 내 입장을 말하자면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이다. 모든 생명은 각각의 개체로서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인간과 다른 생명들을 비교한다면 더더욱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곤충이라고 부르는 녀석들만 보더라도 팔다리가 6개라는 것 외에는 도저히 같은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곤충이라고 묶어 부른다. 곤충 위로 더 크게 보자. 동물, 이 말 안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 식물이고 싶지 않은 모두는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 이 말 안에는 식물마저도 포함되어 있다.
위와는 다른 관점으로 미세한 분자들의 세계에서 살펴보면, 모든 생명은 탄소 화합물이다. 다시 이것을 하나씩 떼어내면 화학의 원자 주기율표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주기율표 안의 원자들은 서로 수는 다르지만, 질량을 가진 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로 되어 있다. 이렇게 미세한 세계까지 와서는 E=mc2 이라는 공식에 의해 질량은 에너지로 날아가 버린다. 이것에서 다시 인간까지 올라가 보면, 인간도 에너지의 흐름(또는 양)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것을 ‘인간은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통분이 끝났다. 위의 이야기는 분수끼리의 덧셈에 분모를 일치시키면 계산이 편리하듯, 인간을 에너지로 나타내어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일치시켜본 것이다. 이제 인간(생명과 같은 개념, 이하에서는 생명이라고 적음)과 자연을 하나의 선으로 그리고, 그 흐름을 보자.
3. 인과적 결정론
자유 의지, 이것에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결정론, 그중에서도 인과적 결정론. 이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견해라 생각한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이 인과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결정론으로서 보다는 과학으로서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과학의 기초위에 세워진 세상 속에서 과학을 부정할 수 없으니, 모든 현상들이 인과에 따라 나타나고 그것이 결정론으로까지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론에 대한 반발로 생명의 행위와 자연 현상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같은 선상에 놓고 본다면 어떨까?
4. 생명과 자연, 그 에너지의 흐름
자연 상태에서의 에너지의 흐름은 흔히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법칙이라고 알고 있는 열역학 제 2법칙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법칙은, 모든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한다. 이 법칙의 중요성을 살펴보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방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측을 할 수 있고, 인과 관계가 형성된다.(그리고 이것은 결정론으로 간다.)
역시 생명의 행위는 결정되어 있다는 것인가? 대답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이다. 열역학 법칙에서의 에너지의 흐름을 생명에게 그대로 적용하고자 한다면, 생명은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흩어지는 에너지를 말 하는데, 생명에게 적용한다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를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생명은 중간 중간 엉켜있는 뭉치들과 같은 존재다. 풀려야 하는데 풀리지 않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에너지를 모으고 그것을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생명, 이러한 생명을 나타내는 말로는 네겐트로피(Negentropy, Negative Entropy)가 더 어울릴 것이다.
그렇다면 네겐트로피의 개념으로 생명의 자유 의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 아쉽게도 아직은 “생명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방향성을 가진 엔트로피의 반대 개념이라면 방향만 반대일 뿐, 분명 방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은 예측을 낳고, 예측은 인과 관계를 낳는다. 그러나 이것도 결정론으로 갈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는 않겠다. ‘방향’이라는 공통의 속성을 찾긴 했지만, 그것이 반대된다는 것의 의미를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두 방향의 에너지, 두 에너지계
생명 활동, 이것을 에너지로 나타내자면 어떤 모습이 될까? 공 던지기 놀이를 예로 생각해보자.
내가 공을 던졌고 그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공을 받는 사람의 실수로 공은 땅에 떨어졌고 얼마간 굴러가다 멈춰버렸다. 상대방은 공을 쫓아가 주워 들고는 다시 나에게로 던진다. 공은 왜 멈추었을까? 나는 분명 공이 날아갈 수 있게 에너지를 주었는데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공은 날아가는 동안의 공기의 마찰로 인해 속도가 일정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다 땅에 떨어지자 땅과의 마찰력이 더해져 더욱 빨리 느려졌고 결국 멈추었다. 내가 처음 공에 주었던 에너지는 주변과의 마찰로 인해 흩어져 버린 것이다. 만약 정밀한 온도 측정기로 공의 온도를 측정해보면 마찰로 인해 약간의 열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연 상태의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바뀌며 흩어져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공이 다시 나에게로 날아온 것이다. 공은 에너지를 모을 수 없다. 그런 공이 나에게 날아 온 것은, 누군가 다시 공에 에너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가 흩어지는 도중에 공에 흘러들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생명은 에너지를 모으는 존재인데 그 에너지가 공으로 흩어질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부러 에너지를 주었단 말인가?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앞에서 말 했듯이 자연의 에너지들은 자꾸만 변하고 흩어진다. 생명은 이와는 반대로 에너지를 모은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의 몸 크기 보다는 지금이 훨씬 크다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자연 전체를 하나의 에너지계(界)로 정하고, 생명을 자연에 속해 있지만 그와는 독립된 또 하나의 에너지계로 보았다.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속해 있다는 것은 바다 위의 섬과도 같은 것이다. 바다는 아니지만 바다 밖에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섬 아닌가.
이러한 두 에너지계 사이에서의 에너지 교환, 이것이 바로 생명 활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공에 에너지를 가해 날아가게 만든다. 이 순간 생명이 간직하고 있던 에너지가 자연 속으로 이동했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변해가고 흩어진다. 인과 법칙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6. 생명은 왜 에너지를 사용하는가?
생명은 에너지를 모으고 저장하는 독립된 에너지계이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인과 법칙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유 의지는 존재할 수도 있다. 생명과 자연 두 에너지계 사이에서 에너지는 - 각각의 에너지계 내에서는 에너지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과는 다르게 - 그 사이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의문이 생긴다. 생명은 왜 에너지를 사용하는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인과를 벗어나 자유 의지를 가질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이다. 이제는 에너지의 문제를 떠나, ‘왜 행동하는가?’ 라는 물음 속에서 자유 의지를 찾아보자.
7. 우리는 왜 행동하는가? - 심리학적 접근
먼저,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심리학의 학습 원리의 내용 중 한 가지를 인용한다.
유기체의 행동목록에 없는 새로운 반응의 습득은 조작적 조건형성 원리로 잘 설명될 수 있다. 조작적 조건형성원리의 핵심은 개체의 반응은 그 반응의 결과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 그런 반응이 일어날지, 더 이상 그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게 될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반응의 결과로 행위자에게 보상이 주어지면 다음에 그런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증가하고, 반대로 특정 반응 이후에 보상이 없던지 처벌이 가해지면 다음에 그 반응을 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때 ‘조작적’이라는 말은 학습자가 목적을 가지고 환경을 조작한다는 뜻이다.
(시그마 프레스 출판, 교양심리학 96~97쪽 )
나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러나 배가 고프다는 것이 밥을 먹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둘 사이를 원인과 결과로 연결하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관찰되어 당연시되기 때문일 뿐이다. 밥을 먹는 것은 “밥을 먹어야겠다.”라는 목적이 있고, 그것이 가능한 상황에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가? 그것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이 나에게 좋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것과 밥을 먹는 것은 원래는 독립되어 있는 것이지만, 배고픔과 먹는다는 것을 연결시킴으로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다. 목적은 행동의 선택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목적이 변하게 되면 행동도 변하게 된다. 그 예로, 어느 날 거울을 비친 자신의 살찐 모습에 충격을 받고는 단식으로 살을 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행동은 목적에 따라서 나타나게 된다. 목적을 가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행동하는가?’라는 물음의 대답이 된다.
8. 목적에 대하여
목적,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행동 앞에 있게 된다면 절대적 원인이 되지는 않을까?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지는 않을까? 이러한 또 다른 물음에 대해서 나는 ‘목적은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원인과 결과, 그것은 모두 어떠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것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 결과는 미래로서 예측 가능하기도 하지만 - 이미 과거의 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내가 가진 목적은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 까지는 어떠한 사건으로도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목적이란 마치 글의 제목과도 같다. 제목의 실현을 위해 나는 개요를 짜고 본문을 적어 내려간다. 제목과 개요는 행동 이전의 상태로 그 구분이 매우 모호하지만, 글을 적는 다는 행동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9. 꼬리말
생명과 그 삶의 공간,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인과법칙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인과법칙은 생명의 활동마저도 끌어안을 수는 없었고, 그로부터 분리된 생명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목적 또한 원인과 결과를 따질 수 없는 것이기에, 자연과학적 인과법칙에 의한 결정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며 목적은 그 상징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을 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은 조금 전 말 했듯이, 자연과학적 인과법칙에 의한 결정론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의 제목은 ‘자유 의지와 결정론’으로,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틀렸다면 다른 한 가지는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을 내리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결정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과학적 견해랍시고 이것저것 끌어 왔지만, 정작 자유 의지를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흑백의 세계에서 검은 종이를 들고 “이것은 검은 종이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이것은 흰 종이가 아니다.”라고 말 하는 기분이 든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 우리는 지금 이 두 가지 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현생 인류의 사고를 넘어서서도 이것이 흑백논리가 아닐 수 있을까? 만약 이 두 가지 견해가 인간 사고의 한계로 인해 제한되어 버린 문제가 아니라, 진정 두 가지로 구분 되는 것이라면 나는 자유의지의 손을 들어 주겠다.
1. 머리말
우리에겐 과연 의지의 자유가 있을까? 있다면 혹은 없다면,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 앞에 보이는 현실들을 관찰함으로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은,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어떻게 연결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두 가지 견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견해로서 우리가 현실로 느낄 수 없는 것, 신학적 결정론과 운명적 결정론은 언급하지 않고자 한다.
2. 통분
자유 의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인간이란 그가 몸담고 있는 자연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가를 생각해보자. 내 입장을 말하자면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이다. 모든 생명은 각각의 개체로서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인간과 다른 생명들을 비교한다면 더더욱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곤충이라고 부르는 녀석들만 보더라도 팔다리가 6개라는 것 외에는 도저히 같은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곤충이라고 묶어 부른다. 곤충 위로 더 크게 보자. 동물, 이 말 안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 식물이고 싶지 않은 모두는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 이 말 안에는 식물마저도 포함되어 있다.
위와는 다른 관점으로 미세한 분자들의 세계에서 살펴보면, 모든 생명은 탄소 화합물이다. 다시 이것을 하나씩 떼어내면 화학의 원자 주기율표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주기율표 안의 원자들은 서로 수는 다르지만, 질량을 가진 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로 되어 있다. 이렇게 미세한 세계까지 와서는 E=mc2 이라는 공식에 의해 질량은 에너지로 날아가 버린다. 이것에서 다시 인간까지 올라가 보면, 인간도 에너지의 흐름(또는 양)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것을 ‘인간은 에너지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 통분이 끝났다. 위의 이야기는 분수끼리의 덧셈에 분모를 일치시키면 계산이 편리하듯, 인간을 에너지로 나타내어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와 일치시켜본 것이다. 이제 인간(생명과 같은 개념, 이하에서는 생명이라고 적음)과 자연을 하나의 선으로 그리고, 그 흐름을 보자.
3. 인과적 결정론
자유 의지, 이것에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결정론, 그중에서도 인과적 결정론. 이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견해라 생각한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이 인과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결정론으로서 보다는 과학으로서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과학의 기초위에 세워진 세상 속에서 과학을 부정할 수 없으니, 모든 현상들이 인과에 따라 나타나고 그것이 결정론으로까지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론에 대한 반발로 생명의 행위와 자연 현상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같은 선상에 놓고 본다면 어떨까?
4. 생명과 자연, 그 에너지의 흐름
자연 상태에서의 에너지의 흐름은 흔히 엔트로피(Entropy) 증가의 법칙이라고 알고 있는 열역학 제 2법칙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법칙은, 모든 에너지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한다. 이 법칙의 중요성을 살펴보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방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측을 할 수 있고, 인과 관계가 형성된다.(그리고 이것은 결정론으로 간다.)
역시 생명의 행위는 결정되어 있다는 것인가? 대답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이다. 열역학 법칙에서의 에너지의 흐름을 생명에게 그대로 적용하고자 한다면, 생명은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흩어지는 에너지를 말 하는데, 생명에게 적용한다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를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생명은 중간 중간 엉켜있는 뭉치들과 같은 존재다. 풀려야 하는데 풀리지 않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에너지를 모으고 그것을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생명, 이러한 생명을 나타내는 말로는 네겐트로피(Negentropy, Negative Entropy)가 더 어울릴 것이다.
그렇다면 네겐트로피의 개념으로 생명의 자유 의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 아쉽게도 아직은 “생명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방향성을 가진 엔트로피의 반대 개념이라면 방향만 반대일 뿐, 분명 방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은 예측을 낳고, 예측은 인과 관계를 낳는다. 그러나 이것도 결정론으로 갈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는 않겠다. ‘방향’이라는 공통의 속성을 찾긴 했지만, 그것이 반대된다는 것의 의미를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두 방향의 에너지, 두 에너지계
생명 활동, 이것을 에너지로 나타내자면 어떤 모습이 될까? 공 던지기 놀이를 예로 생각해보자.
내가 공을 던졌고 그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공을 받는 사람의 실수로 공은 땅에 떨어졌고 얼마간 굴러가다 멈춰버렸다. 상대방은 공을 쫓아가 주워 들고는 다시 나에게로 던진다. 공은 왜 멈추었을까? 나는 분명 공이 날아갈 수 있게 에너지를 주었는데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공은 날아가는 동안의 공기의 마찰로 인해 속도가 일정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다 땅에 떨어지자 땅과의 마찰력이 더해져 더욱 빨리 느려졌고 결국 멈추었다. 내가 처음 공에 주었던 에너지는 주변과의 마찰로 인해 흩어져 버린 것이다. 만약 정밀한 온도 측정기로 공의 온도를 측정해보면 마찰로 인해 약간의 열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연 상태의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바뀌며 흩어져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공이 다시 나에게로 날아온 것이다. 공은 에너지를 모을 수 없다. 그런 공이 나에게 날아 온 것은, 누군가 다시 공에 에너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가 흩어지는 도중에 공에 흘러들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생명은 에너지를 모으는 존재인데 그 에너지가 공으로 흩어질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부러 에너지를 주었단 말인가?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앞에서 말 했듯이 자연의 에너지들은 자꾸만 변하고 흩어진다. 생명은 이와는 반대로 에너지를 모은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의 몸 크기 보다는 지금이 훨씬 크다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자연 전체를 하나의 에너지계(界)로 정하고, 생명을 자연에 속해 있지만 그와는 독립된 또 하나의 에너지계로 보았다.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속해 있다는 것은 바다 위의 섬과도 같은 것이다. 바다는 아니지만 바다 밖에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섬 아닌가.
이러한 두 에너지계 사이에서의 에너지 교환, 이것이 바로 생명 활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공에 에너지를 가해 날아가게 만든다. 이 순간 생명이 간직하고 있던 에너지가 자연 속으로 이동했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변해가고 흩어진다. 인과 법칙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6. 생명은 왜 에너지를 사용하는가?
생명은 에너지를 모으고 저장하는 독립된 에너지계이다. 따라서 자연과학의 인과 법칙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유 의지는 존재할 수도 있다. 생명과 자연 두 에너지계 사이에서 에너지는 - 각각의 에너지계 내에서는 에너지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과는 다르게 - 그 사이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의문이 생긴다. 생명은 왜 에너지를 사용하는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인과를 벗어나 자유 의지를 가질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이다. 이제는 에너지의 문제를 떠나, ‘왜 행동하는가?’ 라는 물음 속에서 자유 의지를 찾아보자.
7. 우리는 왜 행동하는가? - 심리학적 접근
먼저,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심리학의 학습 원리의 내용 중 한 가지를 인용한다.
유기체의 행동목록에 없는 새로운 반응의 습득은 조작적 조건형성 원리로 잘 설명될 수 있다. 조작적 조건형성원리의 핵심은 개체의 반응은 그 반응의 결과에 따라 앞으로도 계속 그런 반응이 일어날지, 더 이상 그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게 될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반응의 결과로 행위자에게 보상이 주어지면 다음에 그런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증가하고, 반대로 특정 반응 이후에 보상이 없던지 처벌이 가해지면 다음에 그 반응을 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때 ‘조작적’이라는 말은 학습자가 목적을 가지고 환경을 조작한다는 뜻이다.
(시그마 프레스 출판, 교양심리학 96~97쪽 )
나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러나 배가 고프다는 것이 밥을 먹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둘 사이를 원인과 결과로 연결하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관찰되어 당연시되기 때문일 뿐이다. 밥을 먹는 것은 “밥을 먹어야겠다.”라는 목적이 있고, 그것이 가능한 상황에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가? 그것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이 나에게 좋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것과 밥을 먹는 것은 원래는 독립되어 있는 것이지만, 배고픔과 먹는다는 것을 연결시킴으로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다. 목적은 행동의 선택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목적이 변하게 되면 행동도 변하게 된다. 그 예로, 어느 날 거울을 비친 자신의 살찐 모습에 충격을 받고는 단식으로 살을 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 행동은 목적에 따라서 나타나게 된다. 목적을 가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왜 행동하는가?’라는 물음의 대답이 된다.
8. 목적에 대하여
목적, 이것이 언제나 우리의 행동 앞에 있게 된다면 절대적 원인이 되지는 않을까?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요소가 되지는 않을까? 이러한 또 다른 물음에 대해서 나는 ‘목적은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원인과 결과, 그것은 모두 어떠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것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 결과는 미래로서 예측 가능하기도 하지만 - 이미 과거의 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내가 가진 목적은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 까지는 어떠한 사건으로도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목적이란 마치 글의 제목과도 같다. 제목의 실현을 위해 나는 개요를 짜고 본문을 적어 내려간다. 제목과 개요는 행동 이전의 상태로 그 구분이 매우 모호하지만, 글을 적는 다는 행동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9. 꼬리말
생명과 그 삶의 공간,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인과법칙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인과법칙은 생명의 활동마저도 끌어안을 수는 없었고, 그로부터 분리된 생명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목적 또한 원인과 결과를 따질 수 없는 것이기에, 자연과학적 인과법칙에 의한 결정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며 목적은 그 상징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을 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은 조금 전 말 했듯이, 자연과학적 인과법칙에 의한 결정론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의 제목은 ‘자유 의지와 결정론’으로,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틀렸다면 다른 한 가지는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을 내리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결정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과학적 견해랍시고 이것저것 끌어 왔지만, 정작 자유 의지를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흑백의 세계에서 검은 종이를 들고 “이것은 검은 종이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이것은 흰 종이가 아니다.”라고 말 하는 기분이 든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 우리는 지금 이 두 가지 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현생 인류의 사고를 넘어서서도 이것이 흑백논리가 아닐 수 있을까? 만약 이 두 가지 견해가 인간 사고의 한계로 인해 제한되어 버린 문제가 아니라, 진정 두 가지로 구분 되는 것이라면 나는 자유의지의 손을 들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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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결정론과 인간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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